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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굿윌헌팅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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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준기 | Date 2020-01-09 12:59:47 | hit 1,909 |
작품명 : [영화] 굿윌헌팅 내용 : 어린 시절 부모로부터 반복적인 트라우마 받은 사람은 자연스럽게 마음의 방어벽이 생겨날 수밖에 없다. 또 언제 어떻게 당할지, 누구에게 배신당할지 알 수가 없으니 세상 누구도 가까이 다가오지 못하게끔 어려서부터 의심과 경계의 벽을 만들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러한 의심과 경계의 벽은 누군가가 선의를 갖고 그 고통을 이해할 수 있다며 다가올 때 더욱 더 견고해진다. “정말 날 선의로 도우려 하는 것인지? 나에게 뭘 바라는 것은 아니야? 혹은 나를 이용하려는 것은 아닌가?”하는 의구심 때문에 다가오는 상대방과 반사적으로 거리를 두게 된다. 가끔 상대방의 의도가 진실이란 걸 알게 될 때도 있지만, 대개 그 선의의 의도를 비웃는다. “당신은 운이 좋아서 나 같은 상처를 경험하지 않았잖아? 그런데 어떻게 당신 같은 평범한 사람이 내 마음 속 깊은 곳의 상처를 눈꼽만큼이라도 이해할 수 있겠어?”, “도움 같은 거 필요 없어, 당신은 날 도울 수가 없다구.” 어차피 보통 사람들은 자신이 겪은 고통을 완전하게 이해하지 못할 것이라는 생각에 선의의 의도조차 밀어내는 것이다. 그들은 또한 자신들의 고통을 설령 이해한다고 해도 오히려 나중에는 자신들을 이상하게 생각하여 기피하고 떠나가 버릴 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을 갖고 있기도 한다. 마음 속 깊은 곳에는 “그렇게 된 것은 내 잘못이었다”라는 자책하는 믿음과 그런 자신의 존재 자체에 대한 강렬한 수치심이 자리 잡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종종 상대방이 떠나가기 전에 먼저 자신이 상대방을 떠나가기도 한다. 결국 나중에는 누구도 믿을 수 없는 세상을 원망하면서, 외로워도 그 누구도 믿지 못하고, 사랑하는 사람이 다가와도 사랑 하지 못하게 된다. 어쩔 수 없이 혼자 맘을 달래보려 술 섹스 약물에도 빠져보지만 마음의 벽속에 갇힌 공허감, 외로움, 분노감, 수치심은 시간이 갈수록 커질 뿐이다.
미국 독립 영화의 거장 구스 반 산트 감독의 ‘굿 윌 헌팅’은 어린 시절 트라우마를 받아 마음의 문을 걸어 잠근 주인공과 그의 마음의 문을 열려는 치료자 사이의 팽팽한 갈등과 긴장감이 잘 드러난 작품이다. 수학에 천재적인 재능을 갖고 있지만 대학교에서 청소부 일을 하고 있는 21세 청년 윌 헌팅과 그를 치료하려는 심리학 교수 숀 맥과이어 간의 소통과 교감이 감동적으로 잘 그려지고 있는 영화이다. 이 영화의 주인공 역할을 맡은 맷 데이먼은 잘 알려진 대로 하버드 대학 출신(영문과 중퇴)인데, 문예창작과 수업 때 썼던 50페이지 분량의 단편 소설을 친구 벤 애플렉과 합심해 영화 각본으로 완성했다고 한다. (이 영화는 1998년 제70회 아카데미상 9개 부문 후보에 올라 맷 데이먼과 벤 애플렉이 각본상을, 로빈 윌리엄스가 남우조연상을 수상했다.)
아일랜드 이민 후손으로서 어린 시절부터 양부의 학대를 받고 자란 주인공은 수학에 천재적인 재능을 갖고 태어나지만 그런 재능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밑바닥 같은 인생을 살아간다. 동네의 건달들과 어울리는 그는 아무런 꿈과 희망이 없는 삶을 살면서, 상습적인 사기, 도벽, 폭력 전과로 감방을 제 집 드나들듯 한다. 타고난 재능의 발현을 막고 있는 암울한 주변 환경과 현실이 그의 삶을 방황하게 만들고 있었던 것이다. <!--[endif]--> 그러다가 우연한 기회에 그의 천재성은 제랄드 램보 교수(스텔란 스카스가드 분)의 눈에 띄게 된다. 램보 교수는 MIT에서 잘 나가는 수학 교수였고, 수학의 노벨상이라는 필즈상을 수상했던 석학이었다. 폭력 사건으로 윌이 감옥에 가야 할 처지가 되었을 때, 윌의 천재성을 알아본 램보 교수는 감옥에 가는 대신 자신과 같이 수학 연구를 하면서 상담 치료를 받아보자고 권유한다. 그러나 윌은 자신에게 다가오려는 치료자들의 머리 꼭대기에 기어올라 오히려 그들을 비웃으며 그들의 치료를 조롱한다. 윌의 마음의 벽은 너무나 견고하여 누구도 쉽게 열지를 못한다. 여러 치료자들이 머리를 설레설레 저으며 물러난다. 할 수 없이 램보 교수는 대학시절 자신의 라이벌이었던 친구이자 심리학 교수인 숀 맥과이어 교수(로빈 윌스암스 분)에게 윌 헌팅의 상담을 부탁하게 된다.
첫 상담시간부터 월은 숀 교수를 슬슬 화나게 한다. “당신이 정말 날 치료할 수 있어? 내 아픔을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이야?” 하는 식으로 그는 숀 교수를 테스트한다. 숀 교수에게 사랑하는 아내를 잃은 상처가 있다는 것을 눈치 챈 윌은 일부러 “외로워 보이는데 아내가 도망갔느냐?”라고 물으며 숀 교수를 자극한다. 순간적으로 흥분한 숀 교수는 화를 참지 못하고 윌의 목을 조른다. 숀 교수의 이러한 행동은 분명 치료자답지 못하다고 할 수도 있겠지만, 오히려 어느 정도는 인간적으로 느껴지기도 한다. 의도적으로 악의를 갖고 한 나쁜 행동에 대해서는 분명히 한계를 알려주는 것 또한 치료자의 역할이니 말이다. 다행이도 그렇게 분노했음에도 불구하고 숀 교수는 포기하지 않고 윌을 계속 치료하겠다고 한다. 어쩌면 숀 교수는 이렇게 심한 저항의 이면에는 간절히 도움을 청하는 마음도 함께 있다는 것을 눈치챘기 때문일 것이다.
이 영화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장면은 마지막 상담 시간이다. 월이 자신의 불행했던 과거를 말하는 것이 두려워하며 피하려하자, 뜻밖에도 숀 교수는 자기 자신의 어린 시절 학대 경험을 먼저 이야기 한다. 갑작스러운 숀 교수의 이야기에 윌은 순간 당황 한다. 숀 교수가 어린 시절 경험한 트라우마가 자신이 경험한 트라우마와 비슷했기 때문이다. “아버지는 알콜 중독이었어. 늘 고주망태였지. 술에 취해 누군가를 팰 생각만 하는 사람 같았어. 난 엄마와 동생이 맞지 않게 하려고 먼저 덤벼들었지. 반지를 끼고 있는 날은 더 재미있었어.” 두렵고 절망스러웠던 자신의 과거를 숀 교수가 아무렇지도 않게 이야기 하자, 윌은 무언가에 홀린 듯, 아주 자연스럽게 자신의 과거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그 남자는 늘 탁자 위에 렌치와 몽둥이와 혁대를 올려놓고, 이 중에서 선택하라고 했었죠. 난 렌치를 선택했어요. 할 때까지 해보란 심정이었죠.” 그런데 여기까지 이야기 한 윌은 갑자기 엉뚱한 이야기를 하려 한다. 얼떨결에 과거 이야기를 꺼냈는데 상상이상의 두려움과 분노 그리고 수치심이 올라오니까 본능적으로 피하는 모습을 보인 것이다
그러나 노련한 치료자인 숀교수는 회피하려는 윌에게 다가가면서 다음과 같이 부드럽게 속삭인다. “그건 네 잘못이 아니야!”(It's not your fault!) “(무슨 소리야? 하는 얼굴 표정을 짓더니 이내 고개를 숙이며),, 네 알아요” “얘야, 잠깐 날 똑바로 쳐다볼래. 그건 네 잘못이 아니야!” “(시시컬렁하다는 표정으로) 안다니까요.” “네 잘못이 아니야!” “(이번에는 치료자를 노려보면서) 글쎄 안다니까.” “아냐 아냐 넌 몰라. 그건 네 잘못이 아니야” “(안절부절 하며 자리에서 일어나면서) 알아요” “그건 네 잘못이 아니야” “좋아요. 알았어요(이제 그만해요. 괴로워요)” “그건 네 잘못이 아니야” “(고개를 숙이고 침묵. 일촉즉발의 상황) .....” “그건 네 잘못이 아니야” “(울먹이며),, 제발 성질나게 하지 말아요” “그건 네 잘못이 아니야” “(치료자를 강하게 밀쳐내며) 성질나게 하지 말란 말이에요. 선생님만이라도” “네 잘못이 아니었어” “(얼굴을 두손으로 감싸고 흐르끼기 시작) .....” “(부드럽게 주인공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네 잘못이 아니었어 “(얼굴을 두손으로 감싸고 오열하다가 치료자를 부둥켜 안는다).... 미안해요 정말 미안해요” “(그냥 가만히 따뜻하게 끌어안아준다.)”
숀 교수는 윌에게 무려 10번이나 네 잘못이 아니다 라고 반복해서 말을 한다.
왜 숀 교수는 1번 혹은 2번 정도만 말을 해도 알아들을 뻔한 말을 굳이 10번이나 반복해서 말을 했을까?
어린 자신이 양부모에게 저항하지 못하고 무기력하게 당한 것에 대한 수치심, 엄마 혹은 동생을 지키지 못한 것에 대한 수치심을 윌은 오랜 시간동안 가슴에 품고 살아왔을 것이다. 사실 객관적으로 보자면, 그 당시 어린 윌로서는 거칠고 폭력적인 양아버지에개 대항하여 할 수 있는 것이 당연히 없었을 것이다. 그 폭력 사건의 잘못은 분명 양아버지에게 있다. 혹은 어린 윌을 끌어안고 집에서 도망쳐 나오지 못한 엄마에게도 잘못이 일부 있을 수 있다. 그런데 윌은 그 당시에 일어난 모든 사건에 대한 잘못이 자신에게 있다고 굳게 믿고 있다. 아니 그런 자신에 대해 부끄러움을 느끼고 있다. 완전히 부끄러움에 압도되어 있다.
부끄러움은 강렬한 신체의 반응이다. 부끄러움은 누군가의 비난과 공격에 대한 자연적인 방어 기제로 거의 얼어붙는(freezing) 것과 유사한 신체의 반응이 일어나는 것이다. 그래서 강렬한 부끄러움에 압도되면, 당사자의 전전두엽은 완전히 기능이 고장난다. 즉, 수치심의 감정은 물론이고 두려움과 분노의 감정에 압도되어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생각을 제대로 할 수가 없게 된다.
영화 속에서 보면 치료자인 숀 교수가 2번 정도 “네 잘못이 아니라”라고 말했을 때 주인공 윌은 “그래요, 알아요” 라고 대수롭지 않게 말한다. 사실 이때 숀 교수가 한 말을 윌이 진심으로 이해하고 받아들였다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런데 숀 교수가 반복해서 “네 잘못이 아니야”라고 말하자 드디어 윌은 강렬한 수치심과 분노의 감정을 숀 교수에게 내보이게 된다. 그 감정을 따뜻하게 끌어안아주는 치료자!!!
진정한 수치심의 치유는 관계의 연결감(connectedness) 속에서 일어나는 것이다
(실제로 수치심의 치유가 이 영화처럼 단 2,3분 사이에 드라마틱하게 일어난다면 얼마나 좋을까? 수치심을 꺼내 놓아도 괜찮을 만큼 안정감을 느낄 수 있는 연결감이 생겨나는데는 대개 시간이 필요하다. 이걸 빨리 건너뛸 지름길, fast track은 아직 없다.) |